쿠농 / 황흑 2014. 9. 26. 18:10

달성표 09. 황흑 뱀파이어 조각








쿠로코의 농구 / 황흑 조각

(뱀파이어 소재 주의, 짧음 주의)











  기묘하다, 는 단어를 처음 쓴 이는 무조건 인간일 거라고 키세는 확신했다. 뱀파이어는 한 번 태어나면 몇백 년은 가볍게 살아내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기이하거나 묘하다는 인상을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뱀파이어의 송곳니 하나만 해도 기묘할 것이 틀림없었다. 키세는 아마 지금 자신이 쿠로코를 보며 느끼는 기분이 기묘함이라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쿠로코는 조용히 눈만 뜨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 그래도 평균보다 옅은 머리카락 색깔이 이제는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손과 발끝까지 전부 색을 잃기 시작할 것이다. 쿠로코는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키세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키세는 쿠로코가 누워 있는 방문 앞에서 침대 쪽을 바라보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꽤 한참을 말없이 그렇게, 종용도 체념도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쿠로코는 침대에서 천장을 본 채 똑바로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뱀파이어로서 인간의 몇 십 배를 살아온 사실도 이쯤 되면 전부 소용없었다. 살아온 세월과 참을성의 두께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더 절박한 쪽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다. 결국 키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와달라는 말, 그 한마디 할 기운도 없는 걸로 이해할게요.”


  키세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그 반듯한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애타는 한숨이 아니라 답답한 한숨이었다. 쿠로코가 키세의 말에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키세의 말은 반쯤은 사실이었다. 지금의 쿠로코에게는 손가락 하나, 눈꺼풀 한 번 까딱일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쿠로코가 마음만 먹는다면 도와달라는 의사 표현은 지금쯤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절박한 사람은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키세가 먼저 움직였다. 키세는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와 종이로 만든 인형처럼 누워있는 쿠로코의 상체를 일으켜 앉혔다. 쿠로코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고, 키세가 쿠로코의 목덜미를 망설임 없이 깨물었다. 맹물에 잉크가 퍼지듯 쿠로코의 머리 색깔이 원래의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잃어버릴 수는 없지.

  말라비틀어진 과육마저 손에 넣겠다는 듯, 키세는 서늘하게 웃었다.



*



  뱀파이어에게 물렸을 뿐 쿠로코는 원래 인간이었다. 따라서 함께 사는 가족도 있었고, 다니는 학교도 있었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송곳니 하나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뱀파이어에게 물려 피를 빨린 인간의 신체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육체에서 당연히 이루어지는 세포 재생, 그리고 뱀파이어의 신체에서 당연히 이루어지는 세포 괴사가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한 쪽의 특성을 제거하거나 늦추지 않으면 반쪽짜리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하게 변해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사라지지 않을 방법은 간단했다. 세포 괴사가 완전히 끝나 뱀파이어의 신체가 완성될 때까지, 자꾸 새로 만들어지려는 혈액을 몸 밖으로 꺼내고 그 자리에 뱀파이어의 독을 주입해야 했다. 방법 또한 간단했다. 그때마다 깨물리면 된다. 인간을 한번 물어뜯은 뱀파이어는 그 인간에게 집착 이상의 욕망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키세가 쿠로코의 목덜미를 다른 뱀파이어에게 허락할 리 없었다. 저주스러운 몸의 변화와 함께 뱀파이어의 지독한 소유욕까지 떠안게 된 쿠로코는 불가항력적으로 키세와 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통증조차 익숙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가름할 수 없었지만 뱀파이어의 신체에 가까워질수록 통증의 강도도 약해졌다. 웬만한 가격이나 충돌에도 아파하지 않는 키세를 보면서 쿠로코는 저도 저런 괴물이 되는 걸까요, 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뱀파이어 키세 료타의 연인 쿠로코 테츠야는 키세를 이해했고, 부모님의 아들인 인간 쿠로코 테츠야는 키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겁의 시간을 살아본 존재란 모두 이렇다고 합리화하는 것이 쿠로코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랑은 소유로 완성된다고 믿는 키세는 쿠로코의 입장에서 원망스럽고도 치명적인 존재였다. 눈물이 뜨거운 속에서 끓어 없어졌다. 모든 걸 잃은 자신을 생각하면 슬펐고, 놓을 수 없는 키세를 생각하면 심장이 끓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입을 여는 순간 심장의 열기가 모조리 빠져나갈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키세 군.”


  기운을 차린 쿠로코는 침대 옆 소파에 앉아있는 키세를 불렀다. 키세는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지만 뱀파이어에게는 수면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확실하게 깨어 있었다. 쿠로코는 반응이 없는 키세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학교에 가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의 창문이 굉음을 내며 깨졌다. 순식간에 지진이 난 것처럼 방 전체가 흔들린 것 같았다. 키세가 화를 내고 있다는 의미였다. 유리보다 한참은 연약한 쿠로코가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한 것은 그 와중에도 키세가 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코는 창이 깨지는 소리에 화들짝 떨린 어깨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나는 너와 다른 인간입니다, 하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쿠로콧치 마음대로 해요.”


  키세는 방을 나갔다. 쿠로코는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었다.


  학교에 가면 아오미네가 있었다. 지금의 쿠로코를 아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아무런 감정이 없는 키세가 유일하게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언젠가 키세가 아오미네를 죽여 버리겠다고 선언했을 때, 쿠로코는 키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오미네 군에게 해를 입히면, 나는 당신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

  그래서 사랑할 수도 없게 될 겁니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재능이 없는 편인 키세는 그러나 쿠로코의 얼굴을 보고 제멋대로 구는 것을 포기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있고, 미워하는 동안은 사랑할 수 있다. 엄청난 원망과 증오를 연료로 삼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곁에 남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매 순간 실감하는 것이 쿠로코의 사랑법이었다.

  얼마든지 열 수도, 원한다면 부술 수도, 가루를 낼 수도 있는 나무문을 사이에 두고 키세는 방 밖에 나와 섰다. 인간들이 왜 뱀파이어를 두고 괴물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를 모조리 씹어 삼키고 싶은 감정 같은 게 정상적일 리 없잖아.


  하지만 사랑이었다. 그것밖에는 몰랐다. 키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기묘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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