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농 / 황흑 2014. 9. 22. 02:13

달성표 05. 황흑 조각










작업실에 들어선 쿠로코는 식탁 옆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퍼를 열어 가방 안에서 금붕어 사료 봉지를 꺼냈다. 이미 도착해 소파에 앉아있는 키세와의 인사는 자연스럽게 생략이었다. 키세는 쿠로코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쿠로코는 봉지를 뜯어서 먹이를 어항에 뿌렸다. 금붕어들이 일제히 수면을 향해 헤엄쳐 올라왔다. 먹이 알갱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뽀그르르. 어항 속의 산소공급기가 공기방울을 내뿜었다. 어항 속에서 터지는 기포에 맞춰 쿠로코가 조그맣게 입술을 버끔거렸다. 물에 사는 물고기에게도 산소공급기가 필요하다. 어항은 그런 공간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가야 돼요.”

목도리를 벗어 소파 위에 올려놓는 쿠로코를 향해 키세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키세가 더 오래 집을 비울 구실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채 열두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쿠로코의 머리에 묻었던 눈은 이미 녹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키세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형식상으로는 사진작가 쿠로코 테츠야의 작업실을 방문한 모델 키세 료타였지만, 위화감 없이 공간에 어우러진 키세는 꼭 이 작업실의 주인처럼 굴었다. 늘 쿠로코보다 먼저 도착해 먼저 문을 열고 먼저 들어와 있었다. 애초에 소유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편이 아닌 쿠로코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키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 혹은 누가 누구를 가지고 있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쥐고 있는 것들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느냐, 자기를 감싼 것들에 얼마나 완벽하게 녹아드느냐가 훨씬 중요했다. 사진작가와 모델의 만남은 항상 그랬다.

“저녁은 먹었습니까.”
“배 안 고파요.”

키세의 대답에 비꼬는 기색은 없었다. 쿠로코가 코트를 벗자, 소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키세는 몸을 옆으로 옮겨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소파는 작업실의 크기에 비하면 지나치게 크고 넓었다. 베이지색 니트에 검은 면바지를 입은 쿠로코와 달리 키세는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니트 위로 드러난 쿠로코의 목덜미는 성인 남성의 몸이라기에는 희고 가냘팠다. 그 목덜미에 시선을 꽂은 채로 키세는 쿠로코에게 물었다.

“오늘 못 들어간다고, 집에 얘기해 뒀어요?”
“물론입니다.”

와이프라니 귀찮아. 키세는 속으로 불평을 밀어 넣고 사람이 눕기에 충분한 소파 위로 쿠로코를 넘어뜨렸다. 입술을 잡아뜯을 듯 쿠로코에게 키스했다. 응, 아릿한 통증 때문에 아픈 소리를 내는 쿠로코가 키세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순간 말고는 전부 잊혀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아파요?
…….
참아요. 나 아니면 아프게 할 사람도 없잖아.

쿠로코는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크게 들썩였고, 키세의 숨이 조금 더 가빠졌다. 빈틈없는 몸의 접촉은 정신마저 뒤흔들었다. 이윽고 세계가 부서질 것이다.

좋아요?
…….
미치겠어, 나도.

키세는 주저하지 않고 쿠로코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전부 씹어 삼키고 싶었다. 쿠로코는 숨을 삼켰다. 부둥켜안듯 키세에게 매달렸다. 오로지 둘뿐이었다.


*


지친 쿠로코는 섹스가 끝나자마자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키세는 쿠로코의 맨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바지를 챙겨 입고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아내에게서 힘내서 일하라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와이프라니, 귀찮아.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더없이 상냥한 남편이 될 것이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노력이었다.

“쿠로코 씨.”

키세는 잠든 쿠로코를 불러 보았다. 아내는 쿠로코를 그렇게 불렀다. 쿠로코 씨와 작업하는 거냐고 묻거나, 쿠로코 씨 댁에서 묵는 거냐고 물을 때 그랬다. 키세의 호칭도 이제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쿠로코, 씨.”

우습기도 하지.

…쿠로콧치.
키세의 입에서는 옛 호칭 대신 담배 연기가 길게 터져 나왔다. 아내는 키세가 여전히 금연 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몇 개월은 끊었던 전적이 있었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쿠로코의 작업실에는 처음부터 키세를 위한 재떨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크리스털 위에 기운 빠진 담뱃재가 속속 떨어져 쌓였다.
쿠로코는 몸을 돌려 키세를 등지고 누웠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키세가 담배꽁초를 비벼 끌 때까지 쿠로코는 희뿌연 공기를 들이마셨다. 매운 연기에도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자요?”

키세가 물었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키세는 제 입술을 한 번 매만지고, 쿠로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좀 자요, 피곤할 텐데.”

소파에서 일어선 키세는 욕실로 들어갔다. 쿠로코는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썼다. 코끝이 매웠다. 담배를 배워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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