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농 / 황흑 2014. 9. 22. 02:11

달성표 02. 황흑 조각 (감정동기화 au) 2





쿠로코의 농구 / 황흑 조각

(감정동기화 / Sentimental Synchronization) - 임찹쌀님 제작 설정
폭주하는 쪽은 PS (Pop the Sentiment)
메마르는 쪽은 LS (Lack of Sentiment)
피부 접촉, 특정 감정이 서린 물체와 접촉, PS의 정신에 LS가 동기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감정을 주고받는다.
발작 단계는 다음과 같다.
PS 발작 1단계 :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에 예민해지며, 화를 주체할 수 없거나 눈물이 많아진다.
PS 발작 2단계 : 고열, 심장 박동 130 이상. 주변 환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PS 발작 3단계 :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 정신 분열, 내출혈, 사망.
LS 발작 1단계 : 말수가 줄어들고 넋을 놓게 되며,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LS 발작 2단계 : 단어 망각, 기억력 저하, 불면증, ‘나’라는 존재 이외에는 생각 불가능.
LS 발작 3단계 : 체온 저하, 몸의 끝부분부터 마비, 사망
파트너와 1주일 이상 교류하지 못하면 발작이 시작된다.









01.
키세는 호텔 화장대 위에 있던 스킨로션 병이며 메이크업 도구들을 전부 쓸어내 버렸다. 폭신한 융단 재질로 된 객실 바닥 덕분에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제 왼손으로 꽉 잡아 쥐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거울이라도 박살내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한창 촬영 중인데 주연배우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이 정도 자제는 되는 걸 보면 아직은 다행인가, 하는 생각에 키세는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에 약속된 해외 로케 기간은 닷새였다. 닷새를 놓고도 과연 괜찮을 것인가 불안해하는 키세를 달랜 것은 쿠로코였다. 그 정도면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귀국하는 날에 공항에 마중이라도 나가 주겠노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배우 키세 료타는 프로였고, 쿠로코 테츠야의 연인 키세 료타는 남자였기 때문에 키세는 로케 일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중은 됐으니 집에 꼭 붙어있으라는 인사와 함께 쿠로코와 가벼운 배웅 키스를 나눈 후로 딱 일주일이 흘러 있었다.
망할 감독 자식. 촬영 스태프와 배우를 통틀어 PS나 LS는 키세가 유일했다. 아무도 발작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고, 키세는 길어봤자 이제 이틀 정도면 끝날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감기나 열병 정도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 아파도 촬영 일정이 그러면 참을 수 있는 거잖아, 하고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도 그 자리에서 촬영 현장을 뒤엎지 않은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용한 일이었다.

쿠로콧치.

나지막하게 이름을 중얼거렸더니 속에서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기까지 오는 항공권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지금 제가 이 정도면 쿠로코도 멀쩡한 상태는 아닐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넓은 공항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행선지며 게이트를 설명할 정신도 없다면, 옆에서 제가 직접 챙기지 않으면 아무래도 불안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키세는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침대에 풀썩 걸터앉아 전화를 걸었다. 일본은 아마 깜깜한 새벽일 시간이었지만 그런 것을 고려할 정신은 애초에 없었다.

[ 키세 군. ]
“쿠로콧치…….”

수화기 너머로 착 가라앉은 쿠로코의 목소리가 들리자 키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휴대폰을 붙든 채 소리죽여 펑펑 우는 키세에게 쿠로코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제대로 듣지 못한 키세가 흐느낌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에? 하고 되묻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
“…지금, 지금이요? 어떻게? 그보다 괜찮은 거 맞아요? 움직일 수 있어요?”
[ 울지 마세요. ]
“안, 안 울었어요. 울긴 누가 울었다고.”
[ ……. ]
“쿠로콧치…?”

쿠로코가 조용해졌다. 키세는 휴대폰의 액정을 확인했다. 전화가 끊긴 것은 아니었으니 쿠로코가 침묵하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눈물도 그친 키세가 몇 번이나 대답을 종용했지만 그렇게 이삼 분 정도 고요한 상태가 계속됐다. 평소 같았다면 그럴 리 없었지만 상태가 상태인지라 답답함에 짜증이 난 키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을 좀 해 보라니까요!”
[ 아…. ]

미안합니다. 조그만 소리로 쿠로코가 사과했다.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 자꾸만 화가 났다. 그러니까 진작에 전화를 했으면 좋았을 게 아니냐고, 울렁거릴 만큼 격한 원망과 짜증이 치밀었다. 짤막하게 욕을 읊조린 키세는 결국 휴대폰에 대고 분통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왜 전화 한 통 없었어요!”
[ 생각을 못 했습니다. ]
“진짜 바봅니까? 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 내가 쉬는 시간이면 일본은 한밤중이니까 나는 전화 못 한다고, 내 잠 깨우는 건 상관없으니까 쿠로콧치 쪽에서 전화하라고 내가 그랬잖아요!”
[ …시끄럽습니다. ]

쿠로코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시끄럽다고? 키세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걸터앉았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끄럽다고? 좋아요. 귀찮고 시끄러우니까 전화 끊을게요 그럼.”
[ 키세 군. ]
“왜 부르는데요!”

씩씩거리며 당장에라도 휴대폰을 집어던질 기세로 숨을 몰아쉬는 키세는 쿠로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 잊고 있었습니다. ]
“뭐라고요?”
[ 그, 저는. 정신이 드니까 지금…. ]
“…쿠로콧치?”
[ 모르겠습니다. 키세 군, 이름. 부르고 싶었습니다. ]

상태가 이상했다. 그제야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평소의 쿠로코는 조용하고 흥미 없는 얼굴로 제 할 말은 똑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자꾸 말이 횡설수설 이어졌다. 키세가 계속 듣고만 있으려니 조각난 문장이 띄엄띄엄 이어졌다. 누군지, 잊어서. 자꾸 저는,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르겠습니다, 가 반복됐다. 그러다 돌연 전화가 뚝 끊어졌다.

“쿠로콧치!”

끊긴 전화에 대고 불러봤자 소용없는 것이 당연했다. 계속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쿠로코는 받지 않았다. 이쯤 되면 촬영이고 뭐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상태를 확인시켜도 거기까지일 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캐리어를 열고 옷가지를 대충 쓸어 담는 손이 덜덜 떨렸다. 과열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01.
쿠로코는 조용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시끄럽지 않았다. 키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머리가 울려서 이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였는데, 정작 조용해지고 나니 몸이 추워졌다. 방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쿠로코는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가 이불을 안고 웅크렸다. 무서울 정도로 생각이 뚝뚝 끊어졌다. 며칠이 지났는지 세어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쿠로코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키세와의 통화에서 제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도 잊어버렸다. 키세 군, 하고 중얼거렸다. 아직 키세를 생각할 수 있다,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운이 없어진 쿠로코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잘 수 없었다. 불면증이 찾아든 탓이었다. 미리 발작을 대비하지 못해 수면제도 사두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샜다.

날이 밝아졌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추웠다.



01+01=01.
오후로 잡혀 있던 자기 촬영 분량을 무리해서 제일 처음으로 끝낸 키세는 바로 촬영장을 뛰쳐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안에서 하도 진정을 할 수가 없어서 몇 번을 승무원에게 주의도 받았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비 계산을 할 겨를도 없이 일단 택시를 잡아탔다. 제대로 꽂히지 않는 열쇠 때문에 현관문을 발로 차고 욕을 내뱉는데도 집 안은 조용했다. 키세는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집으로 들어와 쿠로코의 방문을 열었다.

“쿠로콧치!”

쿠로코는 몸을 말고 웅크린 채 고개만 약간 움직여 키세를 보았다. 조그맣게 입이 벌어졌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불 틈에서 손이 쏙 빠져나왔다. 키세는 침대 위로 무너지듯 쿠로코를 품에 안았다. 몸이 차가웠다.

“많이 추웠어요?”

도리도리. 쿠로코가 품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키세는 더 울고 싶지 않아서 터지려는 눈물을 꾹 눌러 참았다. 혼자였다면 참아지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안고 있는 쿠로코 덕분에 가능했다. 쿠로코가 꾸물꾸물 움직여 키세에게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이틀째 못 잔 덕분에 잠이 든 것이었다.

키세는 일주일이 넘게 퍼내지 못한 감정이 고작 몇 십분 만에 전부 흘러드는 게 신기했다. 잠을 못 자는 건 2단계 발작에서나 생기는 일이라 수면제를 준비해 줄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쿠로코가 얼마나 혼자 앓았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분명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키세는 쿠로코가 깨지 않도록 가만가만 팔을 풀었다. 요깃거리라도 만들 작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쿠로코가 잠결에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 가지 말까요?”

끄덕. 딱 한 번 움직인 고개를 용케도 발견한 키세가 조그맣게 웃었다. 그래, 밥보다는 이게 먼저일까. 도로 누워 익숙한 자세로 팔베개를 만들어 준 키세는 잠든 쿠로코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췄다. 놀랄 만큼 평온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반쪽으로는 일주일도 힘들었다. 행운이라고, 키세는 생각했다.



한 번 더, 01.
그동안 자지 못한 만큼을 전부 몰아 자는 것처럼 쿠로코는 몇 시간을 죽은 듯이 잤다. 잠귀가 밝아 키세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깨는 평소와는 달리, 키세가 중간에 일어나 부엌에서 달그락거려도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져서야 겨우 일어나 멍한 머리로 방문을 열자, 매캐한 냄새가 단숨에 코를 찔렀다.

“…키세 군?”
“어, 쿠, 쿠, 쿠로콧치, 깼어요?”

아하하, 멋쩍게 웃는 키세는 얼른 가스렌지 위의 환풍기를 틀었다. 힘차게 돌아가는 환풍기로는 그러나 부엌의 탄 냄새를 전부 없앨 수 없었다. 쿠로코는 키세에게로 다가가, 키세가 몸으로 가리고 있던 프라이팬을 보았다. 놀랍게도 식빵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

“식빵을 불에 태운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니 나, 나도 일부러 그럴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에요!”
“일부러 요리를 망치는 사람도 있습니까.”
“무, 물론 그야 그렇지만, 아 진짜…….”

안 해! 냅다 뒤집개를 집어던지고 나 삐짐 모드에 들어간 키세는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 번 보면 뭐든 따라하는 재주도 요리에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레시피와 순서만 완벽하다고 해서 음식이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니 당연했다. 덕분에 성실하게 몇 번 더 많이 해 본 쿠로코 쪽이 요리에는 조금 능숙했다. 쿠로코는 말없이 프라이팬을 물에 담그고,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아까 키세가 태운 식빵은 겨우 한 쪽 남아 있었고, 과일도 야채도 마땅한 게 없었다. 심지어는 계란이나 우유도 없었다. 며칠간 장을 전혀 보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나가서 먹을까요.”
“네…….”

서로 풀이 죽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망가져 있다가 지금은 고작 저녁 식사 재료 하나에 이렇게 풀이 죽었다는 사실이 우스워서, 키세는 쿠로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폭소를 터뜨렸다. 쿠로코가 눈을 뎅그렇게 뜨자 키세가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쿠로코가 얌전히 키세의 앞까지 걸어왔다.

“나는 이거 먹을래요.”

쪽.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싱글싱글 웃는 키세의 머리를 손날로 한 대 때려준 쿠로코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며 키세에게 잔소리했다. 더 배고프기 전에 빨리 나갈 채비 하세요. 쿠로콧치 너무해애애애, 하고 쿠로코의 뒤를 졸졸 따라 방으로 들어간 키세는 방문을 발로 밀어 닫아버렸다. 아무 것도 안 하고 배가 고프나 좀 더 움직이고 배가 고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쿠로코는 아마도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다시 평온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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