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 카게스가 2014. 9. 22. 02:08

카게스가 / [단편]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이게 몇 번째인지 셀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곧 영업 시간이 끝나니 서둘러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중한 가게 점원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스가와라는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얼마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다가, 시계를 보고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퍼뜩 지갑을 챙겼다. 앳돼 보이던 여자의 눈 옆 눈물점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새벽 세 시 십 분. 차를 가져갈까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연락이 온 곳까지 거리가 먼 것도 아니었고, 카게야마가 몸을 아예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을 리도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탱그렁.
 급하게 움직이던 스가와라가 거실 탁자에 걸려 넘어질 뻔한 탓에 빈 맥주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 하나, 이미 한참 전에 안주도 없이 다 비운 캔. 오늘 늦게 들어가요, 오후 여섯 시쯤 이유도 사과도 설명도 없이 달랑 그렇게 한 줄로 도착한 카게야마의 문자메시지 이후로 스가와라가 섭취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운전은 불가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x 스가와라 코우지
스물 다섯, 스물 하나







 비까지 오고 있었다면 딱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일 거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여름밤답게 적당히 습한 공기에 반팔 티셔츠를 입은 팔이 끈적거렸다. 지하라고 했으니 간판은 일 층에 달려있을 것 같아 주위를 휘 둘러보려던 스가와라의 눈에, 한 건물 입구 계단에 웅크린 어둡고 긴 인영이 보였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잘 보이지 않아도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길래 전화했다는 가게 점원의 말 때문에 그 덩치를 업은 채 층계를 오르는 것까지 각오했는데 어쩐 일로 가게 밖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새 정신이 들어서 제 발로 걸어나온 건지, 영업이 끝난 가게에서 바깥으로 배달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술값을 스가와라가 대신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가게 점원에게 허리 굽혀 사과할 수고도 없어졌다. 스가와라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이런 데서 늘, 너답지 않게.

 "일어나, 집에 가자."
 "선배?"

 강한 술냄새를 풍기며 눈이 죄다 풀려서는 발음이 또박또박했다. 어쩐지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가와라는 손에 힘을 줘 조금 거칠게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으,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킨 카게야마가 스가와라에게 무작정 기대왔다. 자칫 넘어질 뻔한 걸 가까스로 버텨낸 스가와라는 안정감 있게 카게야마의 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그것은 이미 몇 번 이런 상황을 겪은 스가와라에게 요령이 붙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제 발로 잘 걷고 있는 카게야마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마셨어. 운동선수한테 알콜은 쥐약……."
 "헤어졌어요."

 고개를 푹 기울인 채로 중얼중얼, 대뜸 내뱉은 카게야마의 말 때문에 스가와라의 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지 않은 척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속으로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이번엔 며칠째였더라. 몇 주고 몇 달이고 갈 것도 없이 딱 닷새 째라는 것을 기억해낸 스가와라는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위로 대신 돌려주었다.

 "아야미 상이라고 했나?"
 "몰라요. 별로 안 듣고 싶어요, 이름."
 "…예쁘던데 왜."
 "예뻤죠, 예쁘긴."

 역시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고,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마른 속에 불길이 붙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 몰래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점 얘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카게야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추측보다는 바람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그 후 얼마간을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집이 보이자 카게야마가 우뚝 멈춰섰다. 기대 있던 몸을 떨어뜨리더니 스가와라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이제 혼자 걷겠다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뭘 또 새삼."
 "사과는 처음 하는 건데요."
 "……."

 생각해 보니 죄송하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송구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모로 돌리거나, 그러다 눈치를 보듯 한 번 슬쩍 쳐다보거나. 무언가 사과할 일이 생기면 말 대신 그렇게 미안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카게야마였고, 웬만하면 눈치를 채 주는 게 서로에게 평화로웠기 때문에 사과 받은 셈 쳐 주는 스가와라였다. 사과는 처음이라는 말에 비꼼이나 귀찮음, 놀림 같은 기색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어진 스가와라는 비척비척 걸어오는 카게야마를 앞질러 층계를 올랐다. 오 층, 둘이 함께 사는 현관 앞에 먼저 도착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없었다. 문고리를 돌렸다.
 열려 있었다.
 카게야마가 아직 계단을 올라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하, 자신을 향한 비웃음을 한숨처럼 집어삼키고 신발을 벗었다. 거실 불을 켜고 얼른 바닥의 맥주캔부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타이밍 좋게 카게야마가 들어와 현관을 닫았다. 문을 잠갔다.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스가와라가 유리컵에 물을 한 잔 따라 카게야마에게 건네주었다. 카게야마가 물을 받아 마시는 사이 아무렇지 않은 주제라는 것처럼 스가와라가 말을 꺼냈다.

 "일 주일도 안 됐잖아. 싸우기라도 한 거야?"
 "그냥, 별로였어요."
 "그래도 사람이 좀 만나 보고 겪어 봐야 아는 거지 그렇게 금방…."
 "선배."

 괜히 어질러지지도 않은 방바닥을 주섬주섬 치우던 스가와라는 갑작스러운 카게야마의 부름에 움찔했다. 예나 지금이나 할 말이 있으면 남의 말이 끝나든 말든 뚝 자르고 들어오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상황이라든가, 아주 중요한 화제일 때는 기묘할 정도로 훌륭하게 피했기 때문에 그걸로 지적을 해야 했던 기억은 없었다. 의도적인 건지 타이밍이 좋은 건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부름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스가와라는 방바닥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말하라는 듯 소파 위의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술 마셨어요?"
 "…아니."
 "안 마셨어요?"
 "……."

 스가와라가 대답을 아끼자, 카게야마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스가와라의 답이 어떻든 이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옳은 답을 생각하고 있을지 아닐지 알아낼 재간은 없어서, 스가와라는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심심해서, 하고 덧붙였다.

 "어떡하죠."
 "뭘?"
 "왜 예쁠까요."

 카게야마답지 않게 뜬구름잡는 이야기였다. 카게야마의 말을 듣고 의미를 얼른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스가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카게야마의 입장에서는 주어를 생략했을 분 아주 명확한 대사였기 때문에, 스가와라의 침묵을 망설임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죠.
 선배가 왜 예쁠까요.
 소파 등받이에 푹 잠기듯 몸을 기댄 카게야마가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있었다. 스가와라는 조용히 일어나 카게야마가 비운 물컵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천천히 컵을 씻고, 손의 물기를 닦고, 싱크대를 짚고 물끄러미 서 있다가, 거실로 돌아왔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댄 자세 그대로였다. 잠이라도 들었나 싶어 어깨를 흔들어보려고 손을 뻗었다.

 "죄송합니다."
 "…자는 줄 알았잖아. 옷 갈아입고 씻고…."
 "닮았더라구요."

 카게야마는 지나가듯 흘린 말을 남기고 욕실로 휘적휘적 들어갔다. 정말이지 답이 없다. 스가와라는 방금까지 카게야마를 지탱하느라 가죽이 구겨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과는 나한테 할 게 아니잖아.
 술냄새가 발자국처럼 남아있었다. 스가와라는 차라리 자신이 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눈을 뜨기도 전에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팔을 깨달았다. 일요일이었고, 아마도 이른 아침이었고, 카게야마가 제 힘으로 눈을 뜨는 시간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했다. 일부러 깨우고 싶지는 않아서 가만히 빠져나오려고 몸을 움직였더니 팔이 더 세게 감겨왔다. 잠결에 따끈한 체온이 빠져나가려고 하니 무의식적으로 안으려는 거겠지 싶어 한 번 더 시도했지만 더 찰싹 달라붙을 뿐이었다. 금방 포기한 스가와라는 모로 누운 몸통에 깔린 팔을 가까스로 끄집어내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일어났는데."

 우웅.
 어린애처럼 잠투정을 하는 카게야마가 이제는 다리까지 감아 스가와라를 옭아맸다. 덕분에 스가와라의 허리께에 카게야마의 하반신이 딱 달라붙은 꼴이 돼서, 스가와라는 아까보다 좀 더 세게 카게야마를 흔들어 깨웠다.

 "카게야마, 놔 줘."
 "조금만요."

 잠결에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잠꼬대는 아니었다. 왠지 뿌리칠 수 없는 요청이어서 스가와라는 뿌리치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품의 스가와라가 얌전해지니 이제야 만족스러워진 카게야마는 후음, 하고 다시 잠에 빠지는 숨소리를 냈다.

 "카게야마."

 대답이 없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는 일정했고, 움찔거리는 움직임도 없었다. 잠들어서 못 듣든 깨어있어서 들어버리든 상관 없다고 생각한 스가와라는 반쯤은 무모하게 입을 열었다.

 "나랑 닮아서 만났어?"

 역시 대답은 없었다. 다만 평온하던 호흡이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모르겠어."
 "……."
 "닮았다고 만나니까 불행인 건지, 닮아서라도 만나니까 다행인 건지."
 "……."
 "믿어주든 말든 네 선택이지만…."
 "……."
 "헤어지지 않았으면 했어."

 거기까지 말을 마친 스가와라는 품에서 나오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카게야마의 팔이 풀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 스가와라는 수도꼭지를 틀고 한참 거울을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감싸듯 끌어안았던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한 달이었고, 그 다음은 보름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닷새였다. 처음에는 머리 색이 밝았고, 그 다음은 웃는 얼굴이 시원했고, 그 다음은 눈 옆에 작은 점이 있었다. 스무살이 되고 나서부터 스물 한 살의 중반쯤이 된 지금까지 만나 왔던 여자들이었고,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어제와 비슷한 밤이 되풀이되었다.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잔소리를 퍼붓던 스가와라도 어제가 되니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어제까지 만나던 여자는 예뻤다. 예쁘다기보다 마음에 들었다. 닮아서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진심이에요?
 스가와라의 마지막 말에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한쪽 다리를 들어 반동을 주듯 몸을 일으켰다.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을 한 번 쳐다보고 싱크대로 갔다. 그릇 건조대에 놓인 칫솔에 치약을 묻혔다. 차카차카, 이를 닦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나온 스가와라는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켠 카게야마를 보았다. 일단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이제는 운동을 그만둔 자신과는 달리 아직 배구를 계속하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세 끼 식사는 중요했다. 어제 술을 마신 속을 감안해 미소시루를 팔팔 끓이고 반찬을 두어 가지 꺼냈다. 한참을 말없이 달그락거리고 있는데 카게야마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국자를 들고 있던 스가와라가 뒤를 돌아보았고, 저지하거나 놀랄 시간도 없이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스가와라를 휙 돌려놓은 카게야마는 그대로 뒷머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당황스러움에 커다랗게 떠진 눈이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는 것 같아서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마음먹고 뿌리친다면 뿌리칠 완력은 있었지만 카게야마에게 팔을 붙들린 스가와라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혀가 얽혔고, 어쨌든 저 혼자만의 키스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카게야마는 머릿속이 한 바퀴 빙글 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입술이 떨어졌고, 숨이 가빠지기에는 조금 짧은 키스였다. 스가와라는 아직도 제 팔을 잡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가만히 떼어낸 후 싱크대를 향해 돌아섰다.

 "…선배."
 "사과는 안 해도 돼."
 "그게 아니라…."
 "아무 것도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스가와라는 끓고 있는 냄비의 불을 껐다. 심장에도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한 것은 쿵쾅거리는 소리가 바깥까지 다 들릴 것만 같아서였다.

 "저랑 왜 같이 살아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질문에 얼어붙으며, 정말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안일했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매번 왜 데리러 와요?"
 "……."
 "그냥 같이 사는 사람이라? 그냥 그래서 그래요?"
 "…카게야마."
 "대답해 봐요."
 "……."
 "정말 안 헤어지길 바랐어요?"

 스가와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그랬어?"

 평정을 가장하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끝내 격앙된 외침으로 변했다.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카게야마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속에 비해 스가와라는 지극히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응. 정말 그랬어."
 "……."
 "이유를 듣고 싶어?"

 스가와라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용기로 카게야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약간 차이가 나는 눈높이가 부러웠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네 살 터울, 한 번도 학창시절이 겹치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졸업 후 찾아간 체육관에서 마주쳤을 때. 평범한 문학부 대학생이 된 자신과 같은 포지션의 까마득한 후배는 누가 보기에도 체격과 능력 모두 배구에 적합한 천재였다. 같은 고등학생, 같은 현역이 아니어도 부러웠다. 그리고 마냥 부러움인 줄 알았던 감정은 배구부 생활을 마무리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토스를 불러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바뀌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간 올려다봐야 하는 눈은 곧고 솔직했다.

 "…제가 싫으십니까?"

 카게야마는 그렇게 물었다. 이미 반쯤은 절망해 있는 눈동자가 어질어질했다.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올라서 스가와라는 손에 들었던 국자를 집어던지듯 조리대에 내려놓았다.

 "누가 그렇대?"
 "……."
 "멋대로 생각하지 마. 멋대로 속상해하지도 말고."

 어째서 몰라주는 거야, 와 어째서 눈치채는 거야, 의 두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같을 만큼 제 속을 알아주지 못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카게야마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왜, 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카게야마는 이제 혼란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아해서 그랬어."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고, 카게야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왜 내가 네 선배인지, 그것조차 원망스러웠어."
 "……."
 "성 말고 다른 호칭을 쓸 수 있다면 조금 더 거리를 둘 수 있었을까. 너처럼 선배, 라고 지칭할 수 있었다면 네 이름을 매번 되새기느라 힘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
 "하지만 내가 너를 먼저 털어버릴 수는 없어서, 네가 헤어지지 않기를 바랐어."
 "……."
 "이걸로 대답이 됐…."

 말의 끝자락은 품 속으로 사라졌다. 스가와라를 끌어안은 카게야마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바보처럼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을 게 뻔해서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알아, 알고 있어.
 누가 누구에게 고백을 했고, 상대방이 어떻게 대답했고, 그걸 받아주고 말고, 그런 문제는 적어도 지금은 급하지 않았다. 좋아하고 있었고, 똑같이 좋아하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한참을 눈물만 뚝뚝 흘리던 카게야마는 기껏 끓인 미소시루가 다 식을 때까지 울다가 겨우 그쳤다. 눈도 코도 빨개진 얼굴이 스물 한 살의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아 스가와라가 작게 웃었다. 웃지 말아요, 카게야마가 툴툴거리자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 소리내서 웃고 난 스가와라는 슬쩍 눈가를 훔쳤다.

 "다 울었어?"
 "…놀리지 마세요."
 "알았어, 안 놀릴게."

 또 울면 그땐 놀릴 거야, 스가와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누군가를 짓궂게 놀리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멍하게 풀어진 얼굴을 보니 또 웃음이 나서 스가와라는 볼 안쪽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여기까지라고 하자."
 "예…?"

 카게야마는 시장통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같은 얼굴을 했다. 정말이지 솔직하구나. 스가와라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카게야마의 손을 쥐어보았다. 저도 남자 손치고 작은 편은 아니지만 사 년이라는 세월 차이가 무색하도록 크기 차이가 났다.

 "사귀고 말고, 평생 너만 보고, 너 하나만 좋아하고."
 "……."
 "이런 건 일단 두고 보자는 뜻이야."
 "왜…."
 "나중에 네가 제대로 고백하면, 그때 생각해 볼게."

 스가와라가 씩 웃었다. 나는 아직 스물 다섯, 너는 아직 스물 하나니까.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조금은 비겁하게 뒷말을 감춘 스가와라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게야마의 머리칼을 슥슥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좋아해, 카게야마."
 "…선배 지금 저랑 장난해요?"
 "어어, 나는 진심인데."

 뭔가 시원스럽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불퉁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여자랑 사귀는 사이였던 사람, 그것도 오랜 시간 친한 후배로 지내 오던 사람과 갑자기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게 어색해 그런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지금의 말이 무슨 뜻이든 제대로 고백하면 생각해 본다고 했으니 걱정할 건 없다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스물 다섯과 스물 하나의, 시선의 높낮이보다 조금은 더 큰 세월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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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있습니다.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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