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 카게스가 2014. 9. 22. 02:03

카게스가 / [단편] 말로 하지 않아도







 스가와라는 제 귀 양 옆을 받치고 있는, 탄탄하고 까무잡잡한 팔과 어깨를 올려다보았다. 스가와라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게야마는 열이 오른 건지 부끄러운 건지 제법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길게 숨을 내쉰 카게야마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마도 스가와라의 목덜미 쪽에 입을 맞추려는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저보다 키가 큰 카게야마가 제 위에 올라타 있었지만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선배.
 응.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긴장에 꽉 막힌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스가와라의 몸 위로 올라왔다. 유려하게 쓸고 내려가 허리를 매만졌다. 아직 교복 셔츠를 입은 채였지만 몸에 닿는 손가락의 느낌이 생생했다. 스가와라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카게야마가 무언가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더니 큰 손이 허벅지를 지나 아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따끈한 손의 온도가 속옷 위를 덮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스가와라는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어 다리를 움츠렸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괜찮다는 듯이, 서툰 손길로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곧 몸에 힘이 풀렸다. 호흡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날숨이 불규칙적으로 터졌다. 스가와라는 눈을 질끈 감고 점점 빨라지는 손길에 집중했다. 막바지가 보인다, 는 기분이 들자 아직도 입혀진 채인 속옷이 생각났다. 카게야마의 손목을 붙들고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자극하는 속도가 빨라져 그럴 수 없었다. 모든 생각이 지워진 머릿속을 빨갛고 검은 섬광이 가득 채운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침대 시트를 꽉 쥐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소리없는 신음을 흘렸다. 온 몸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방은 어두웠고, 잠옷으로 입은 반팔 티셔츠는 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윽고 티셔츠보다 조금 질척해진 속옷을 깨달은 스가와라의 뭉근해진 머릿속에 꿈, 이라는 한 글자가 둥둥 떠다녔다.
 카게야마.
 미안…….
 스가와라는 내일 아침이 오지 않기를, 그럴 수 없다면 아침 연습만이라도 취소되기를, 하고 간절히 바랐다.







카게야마 토비오 x 스가와라 코우시
말로 하지 않아도








 부스스한 머리로 속옷을 대충 빨아 널고 나니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아침 연습에 가려면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어 한참 고민하던 스가와라는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제목 : 정말 미안해
 내용 : 아침 연습, 오늘만 봐줘. 야단쳐도 달게 받을게.

 디링, 역시 깨어있었던 건지 바로 답장이 왔다.

 제목 : Re : 정말 미안해
 내용 : 무슨 일이야? 몸은 괜찮고?

 스가와라가 어떤 사람인지 본인보다도 더 잘 아는 사와무라는 대번에 걱정하며 안부부터 물어왔다. 차마 거짓말까지는 할 수 없었던 스가와라는 뭐라고 답장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제목 : Re : Re : 정말 미안해
 내용 : 건강은 한데, 운동을 좀 더 해야겠어.

 제가 보내놓고도 우스워서 후 웃은 스가와라는, 이제 아침 연습에 나타나지 않은 자신에게 쏟아질 걱정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다이치와 아사히의 의아한, 니시노야와 타나카의 시끌벅적한, 히나타의 놀라움 가득한, 그리고…….

 제목 : 그래
 내용 : 쉬고 오후에 보자.

 답장을 확인한 스가와라는 휴대폰을 손에 꾹 쥐고 심호흡을 했다. 카게야마는 어떻게 나올까. 무슨 일이냐고 다짜고짜 물어보러 달려오지는 않을까. 혼자 제멋대로 오해하고 고민에 빠지지는 않을까. 하지만 카게야마가 보일 반응들 중에 스가와라가 바라고 있는, 그리고 단 하나의 해결책이 될 그 행동이 없을 것임은 분명했다.

 그 나이 남자 고등학생답게, 두 사람은 사귑시다 그럽시다에 준하는 일련의 고백은 하지 않았다. 마음만 알면 된 거고, 서로에게 서로만 있으면 된 거라고 둘 다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1일, 같은 계산은 스가와라에게는 멋쩍은 짓이었고 카게야마에게는 까다로운 짓이었다. 따라서 그냥 선배가 좋습니다, 나도 네가 좋아, 하고 깔끔하게 시작한 관계는 여전히 깔끔하기만 한 관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껏해야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에서 머물고 있는 스킨십은 진도가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카게야마 쪽에서도 그럴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스가와라에게는 그랬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고, 딱히 무언가 발전한 스킨십을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남자끼리 하는 섹스를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가는 사람이 남자니 언젠가는 남자끼리의 섹스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 해도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꿈을 꾸고 나니까 좀더 구체적인 욕구와 함께 구체적인 고민도 생겨났다. 포지션, 에 대한 문제였다. 나이가 많으니까 내 마음대로, 라든가 키가 더 크니까 네 마음대로, 라는 식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니 더 고민이었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꿈에서 제 위에 올라가 있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끄응…….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니니 고민은 나중에 하자고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 이유는, 당장 제가 욕심이 나기 때문이었다. 이 나이에 몽정을 했어도 부끄러움보다 떨림이 더 큰 이유는 꿈에 등장한 인물이 카게야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끝까지 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예?"
 "뭘 그렇게 놀라?"

 오늘 스가는 안 나온다. 인원 점검이 끝난 직후 사와무라의 공지에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지만, 황당한 얼굴로 되물은 것은 카게야마가 유일했다. 제각기 다른 걱정으로 오묘해진 얼굴들 속에서 혼자만 순수하게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크게 아픈 건지, 무슨 사고가 난 건지, 집안에 일이 생긴 건지, 아즈마네를 비롯한 모두가 우왕좌왕한 얼굴을 했지만 배구공이 오가기 시작하자 금세 체육관의 분위기는 진지해졌다. 끝까지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카게야마가 유일했다.

 "야! 카게야마! 너 지금 어디다 공을 날리는 거야?!"
 "어? 어."
 "어, 가 아니잖아! 얼굴에 맞을 뻔했다고!"

 길길이 날뛰는 히나타의 불평도 한쪽 귀로 흘리고 있는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연습 불참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젯밤 잘 자라는 메시지로 밤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프다는 말이나,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말은 없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스가와라가 티를 냈어도 자신이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카게야마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밤새 갑작스럽게, 연습에도 나오지 못할 일이 생겼다면 그게 무엇인지 카게야마는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었다. 멍한 머리로 아침 연습 시간을 깔끔하게 허공에 날려버린 카게야마는, 1교시가 끝나자마자 쿵쾅쿵쾅 스가와라의 교실로 달려갔다.

 "스가와라 선배!"

 클래스메이트와 진로상담 일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스가와라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뒷문을 쳐다보았다.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는 카게야마의 표정이 스가와라를 보자마자 0.5초 간격으로 바뀌었다. 다급했다가, 멍해졌다가, 당황했다가, 휘둥그레해졌다. 큰일이 난 거면 어떡하지,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왜 아침 연습을,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의 과정으로 생각이 지나가고 있는 게 스가와라의 눈에는 빤히 보였다. 그게 귀여운 와중에 카게야마의 실물을 보자마자 간밤의 꿈이 떠올라, 스가와라는 괜히 열이 오르는 얼굴을 향해 손부채질을 했다.

 "어, 어. 카게야마."
 "선배, 왜, 아침 연습…. 어디 아프세요?"

 거짓말을 할 수도,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상대가 카게야마인 만큼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아직 연인 사이라고 하기에는 심하게 풋풋하긴 했지만, 일단 서로 마음을 확인한 이상 숨기는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둘 모두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숨기는 게 있다는 인상을 줬다가는 아직 피가 펄펄 끓는 카게야마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잠, 잠을 좀 설쳐서. 별 일은 아니야."
 "몸은 진짜 괜찮으신 겁니까?"

 잠을 설쳤다는 말에 카게야마의 눈빛이 급속도로 진지해졌다. 군더더기 없고 곧은 토스처럼 카게야마의 눈빛은 항상 가감없이 솔직했다. 걱정하고 있다는 그 눈빛에 마음이 좀 흔들리는 것 같아서 스가와라가 슬쩍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카게야마의 큰 손이 스가와라의 이마를 덮었다.

 "카, 카게야마?"
 "열은 없으신 것 같은데…."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카게야마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스가와라는 반사적으로 이마에 닿은 카게야마의 손을 탁 쳐냈다. '선행동 후생각'이란 스가와라에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서, 제 행동에 제가 벙찐 스가와라는 물론 제법 매섭게 뿌리쳐진 손을 공중에 들고 당황해 굳어버린 카게야마까지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아니, 몸은 괜찮아."
 "네…."
 "이, 이따가 부실에서 보자. 쉬는 시간 곧 끝이니까 가 보는 게 어때?"

 가 보는 게 어때, 라니 이 무슨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인가 싶었지만 이미 내뱉어버린 말이니 주워담을 수가 없었다. 스가와라에게 남은 선택지는 누가 봐도 억지인 웃음을 하하 지어보이는 것뿐이었고, 덩달아 입꼬리가 삐그덕거리는 것 같은 웃음 아닌 웃음을 매달고 카게야마도 교실을 나갔다. 스가와라는 책상 위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제가 고작 고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사실을 곧잘 잊곤 하는 스가와라는 죄책감과 민망함, 두근거림과 함께 불쑥 치미는 욕구가 뒤섞인 머릿속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가와라의 교실에서 나온 카게야마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다 결국 복도에 우뚝 멈춰섰다. 몇 번을 생각해도 선배의 반응이 이상했다. 교실에서 함부로 이마를 만진(짚은, 이 아니라 만진, 이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하고 있었다) 것은 제 실수였지만 그렇게 쳐내버릴 줄은 몰랐다. 스가와라의 이마를 덮었던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카게야마는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선배는 훨씬 더 스킨십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스가와라가 들었다면 그런 오해는 곤란하다며 펄쩍 뛸 법한 추측이었다. 연애는커녕 사람과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 자체에 서툰 카게야마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에 기인해 상대의 반응을 이해하는 방법밖에 몰랐다. 따라서 스가와라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보다, 자신이 스가와라에게 무언가 잘못한 행동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결론에 먼저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복도에 붙박이 인형처럼 서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제 하교할 때까지만 해도 평소와 같았으니, 무언가 심기를 건드렸다면 부활동 후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그 시간동안 주고받은 이야기들 중에 있어야 했다. 카게야마는 처음 히나타와 편을 먹고 츠키시마들과 했던 그 시합, 괴짜 속공의 첫 토스를 보낼 때보다도 맹렬한 집중력을 발휘해 제 발언과 스가와라의 답장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씻었어요, 나도, 뭐 해, 밥 먹었어요, 이 시간에, 네, 배고팠나보네, 네, 잘 거예요, 안 피곤하세요, 기타 등등.
 그리고 별다른 게 없었다.

 카게야마는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제 잘못도 없는 것 같고. 그렇다면 카게야마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여기까지가 카게야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며 그의 능력의 한계였다. 암담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본 카게야마는 복도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종이 친 것이었다. 이런 히나타 같은 짓을 하다니, 하고 스스로를 질책한 카게야마는 슬며시 교실 뒷문을 열었다.




 스가와라는 체육관의 문을 열기 전에 일단 심호흡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리려는 순간,

 "선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놀라고 말았다. 카게야마였다. 고개 못 돌리겠는데 어쩌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스가와라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뒤돌아 카게야마를 향해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 일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면 괜찮지 않았다. 거울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 제 표정이 아마 굉장히 이상할 거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어, 막 들어가려던 참…."
 "죄송합니다!"

 어?! 갑자기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고 큰 소리로 사죄하는 카게야마 때문에 스가와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갑자기 이게 무슨, 하며 손을 휘휘 내저을 준비를 마친 스가와라를 앞에 두고, 카게야마는 허리를 굽힌 그대로 고개도 들지 않고 줄줄 제 할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저 때문에 난감하고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 어,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카게야마…?"
 "제가, 그…. 함부로 이마에 손을 대거나 그래서 기분이 상하신 거면……."

 간밤의 꿈을 잠시 잊을 정도로 황당한 심정이었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벙한 얼굴로 듣고 있던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주춤주춤 설명을 덧붙인 후에야 카게야마의 말을 대강 이해했다. 역시 단순하고 눈치 없고 남의 속 모르기로 유명한 카게야마여도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제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몹쓸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서, 일단 스가와라는 허리를 굽힌 패기가 무색하게 우물쭈물 횡설수설하고 있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왜 네가 나한테 사과를 해?"
 "예…?"
 "너한테 기분 상한 건 없어. 내가 왜 그랬겠어."

 카게야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얼굴에 한가득 물음표를 띄웠다. 스가와라는 천재에 왕에 무시무시한 별칭으로 위장한 카게야마가 제 앞에서는 이렇게 순진해진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조금 즐거워지곤 했다. 일단 카게야마가 하고 있는 오해부터 풀어주는 게 급했는데, 돌려 말하면 돌린 채로 알아듣는 카게야마였으니 직설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이유는 따로 있다고. 잠시 말을 고르던 스가와라는 일단 붙잡고 있던 카게야마의 어깨부터 슬쩍 놓았다.

 "내가 좀 이상했지? 오늘."
 "아니, 어…. 예, 아니요."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결국 푸 웃음이 터진 스가와라는 체육관 문 앞의 야트막한 돌계단에 털썩 앉았다. 손짓했다. 너도 앉아. 카게야마는 순한 강아지처럼 냉큼 스가와라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가, 엉덩이를 들어 아주 조금 옆으로 떨어졌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다행스러웠다가, 또 서운했다가, 귀여웠다. 스가와라는 다리를 쭉 뻗어 허리를 약간 굽히고 제 발끝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카게야마."
 "예?"
 "네가 내 이마에 손을 댄 게 왜 미안할 일이야?"

 예? 아니, 그게. 말은 못 하고 얼굴이 벌게져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카게야마를 보고 스가와라는 약간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내가 연장자니까 이런 데서 먼저 민망해하면 안 된다는 쓸데없는 책임감마저 느껴졌다. 어쨌거나 꿈을 꾼 건 카게야마가 아니라 나고,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모른다면 카게야마는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뜬금없이 땅을 파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건 스가와라와 카게야마 둘 모두에게, 이 커플에게….
 커플.
 우리는 커플이라는 거구나.
 스가와라가 엷게 웃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카게야마가 슬쩍 스가와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눈치를 보는 것만 같아서 스가와라는 얼른 말을 끝내고 체육관으로 뛰어들어가야겠다고 마지막 결심을 마쳤다.

 "사실, 꿈을 꿨어. 간밤에."
 "꿈…이요?"
 "응. 네가 나오는 꿈."

 거기까지 말을 꺼낸 스가와라는 심장이 쿵쾅거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별 거 아니라고, 혈기왕성한 청소년이면 그 정도야 뭐 흔한 일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면서도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표면적인 의미야 당연히 듣자마자 이해했지만 좋아하는 이의 꿈에 자기가 등장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뒤늦게 알게 된 카게야마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제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내 이마에 손, 대도 괜찮아."

 둘 다 서로의 사정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할 때, 드디어 스가와라가 먼저 운을 띄웠다.

 "괜찮다고, 그 정도는."
 "……."
 "좀 더…. 손 대도 괜찮고."

 잠깐 멍하니 있던 카게야마는 곧 벌떡 일어나며 예에? 하고 되물었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자 체육관 안쪽까지 살폈다. 체육관 안의 풍경이 평소와 다름없이 시끌벅적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스가와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지 않은 스가와라의 머리꼭지에 늘 솟아있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그, 그게 무슨……."
 "너는, 나랑 뭔가 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
 당황함이 가득했던 카게야마의 얼굴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스쳤다. 짧은 순간이지만 카게야마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스가와라는 쳐다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고민을 해 주는구나, 혹은 고민을 해야 하는구나,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하는지 목석이라고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민망함이 좀 수그러져서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알다시피 나도 너도 고등학생이고. 남자고."
 "……."
 "또 알다시피, 나는 너를 좋아해."

 갑작스럽게 다시 마음을 고백한 스가와라 때문에 카게야마는 이제 차라리 교정과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됐다. 물론 좋아한다는 말이야 백 번 천 번도 더 할 수 있었지만 제가 듣는 것은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스가와라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직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꽤 담백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스가와라는 몸을 일으켰다. 카게야마의 앞에 바로 섰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카게야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고 싶더라고. 이런 게."
 "……."
 "너랑."

 아, 미치겠다. 아주 짧은, 수백 걸음 양보해도 키스라고 불러주기에는 한참 모자란 입맞춤이었지만 입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둘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용기를 냈다고 해도 확 달아오르는 얼굴은 어쩔 수가 없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워하려는 찰나, 갑자기 제 어깨를 잡아채 당기는 카게야마 때문에 스가와라는 그만 휘청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입술이 겹쳐졌고,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스가와라는 마치 겁먹은 것처럼 질끈 감겨있는 카게야마의 눈을 보았다. 팔을 카게야마의 어깨로 둘러 가볍게 끌어안은 스가와라는 서툰 카게야마의 입술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그날 오후 연습이 어땠는지는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원 모두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배구부에 있는 세터 두 명이 전부 다 이상했으니 연습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한 명은 아침 연습도 안 나오더니 답지않게 자꾸 정신을 다른 데다 파느라 실수 연발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침 연습 내내 히나타에게 잔소리를 들을 만큼 집중을 못 하더니 오후에는 아예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기계적인 토스만 뱉어냈다. 도대체 둘 다 왜 이러냐고 사와무라가 다그쳐봐도, 미안 그리고 죄송합니다 하는 대답만 돌아오고 별로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불만에 가득 찬 타나카가 이럴 거면 고기만두나 먹으러 가자고 펄펄 뛴 덕분에, 역대 가장 짧은 시간의 방과후 연습이 쫑났다.

 "어이, 카게야마! 스가 선배! …둘 다 어디 갔지?"
 "놔 둬. 둘 다 상태 안 좋던데 일찍 집에 간 모양이지."
 "그래도 우리끼리만 먹으러 갑니까? 의리없게스리."
 "스가 그 녀석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오늘 영 이상하던데. 아침 연습 빠진 것도 그렇고."
 "카게야마도요! 하루 종일 안면 리시브만 할 뻔했다니까요!"

 각자 걱정하는(건지 원망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한 마디씩 던졌지만 연습 후의 배고픈 청소년들은 고기만두 생각에 이내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제의 세터 두 명은 체육관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 후문 앞에 서 있었다.

 "……."
 "……."

 어둑어둑 노을이 지고 있었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까 둘 모두에게 서툰 첫키스가 끝나고 도망치듯 체육관으로 들어가기 전, 카게야마가 이, 이따가 집에 같이, 하는 말만 어중간하게 남기고 자판기 뒤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얼굴을 식힌 건지 뭘 하고 온 건지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체육관으로 들어온 카게야마는 웬일로 네가 지각이냐고 사와무라에게 잔소리를 한바탕 들어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습 내내 대화는커녕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카게야마."
 "아까는."
 "어…?"
 "아까는,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스가와라는 그만 말문이 막혀 카게야마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아직 말이 덜 끝난 얼굴로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던 카게야마는, 제 앞에 서있는 스가와라의 손을 휙 채더니 꾹 잡아쥐었다.

 "잠깐, 카게야마?!"
 "다행이에요."
 "뭐가…?"
 "…싫어하시는 게, 아니어서요."

 어쩐지 카게야마의 눈이 그렁그렁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스가와라는 씩 웃었다. 손을 꾹 잡은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키가 더 큰 카게야마가 꼭 끌려가는 것처럼 스가와라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제 꿈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어쨌든 의미 전달은 됐으니 이걸로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제 손에 꽉 차는 스가와라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공을 만져 굳은살이 박힌 손이지만 제 손에 비해 확연히 희었다. 손등은 보드랍기까지 했다. 카게야마가 엄지로 스가와라의 손등을 가볍게 쓸었다. 둘 모두 피식, 웃었다.
 어둑어둑 노을이 지고 있었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냥 그걸로도 좋았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
TOTAL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