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 카게스가 2014. 9. 22. 23:09

달성표 07. 카게스가 조각 (0922, 카게스가Day)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 기린이 그려진 우유갑을 두 손으로 잡고 열심히 먹고 있던 일곱 살 카게야마의 입매가 결연하게 다물렸다. 어린애 주제에 무얼 그렇게도 야무지게 각오했는지, 이마를 쥐어박아도 손가락이 되려 튕겨나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우유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유치원 가방에서 원아 수첩을 꺼냈다. 신발을 신고, 혼자서 현관문을 열고, 한 층 계단을 내려갔다. 까치발을 딛어 바로 아래층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코시 형!”

  -토비오?


  집안에 있던 사람이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었다. 코시 형이라고 불린 사람은 남자라기에는 아직 앳된 대학 초년생이었다. 씩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는 카게야마가 내미는 원아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숙제하러 왔어요!”


  원아 수첩에는 유치원 선생님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원아들에게 언어 전달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유치원에서 내 주는 숙제인 것 같았다. 푸하하,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서 맑은 웃음이 터졌다. 카게야마가 가져온 숙제는 간단했다.


  가장 좋아하는 가족(부모님, 형제나 자매)에게 좋아합니다, 하고 말한 후 확인을 받아오세요.


  “일단 들어올래? 과자 줄게.”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그의 손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곱 살과 스무 살, 십 삼년의 차이만큼은 어른다웠다.



*



  스가와라는 오랜만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모처럼 출근을 쉬는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부엌에서 성공적인 음식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프라이팬 앞에 서서 볶음밥 재료를 볶던 스가와라는 거실 벽에 매달린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일어날 때가 됐는데 아직이네.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내려놓고 가스 불을 끈 스가와라는 앞치마를 두른 채로 카게야마의 방문을 두드렸다.


  “카게야마!”


  안은 조용했다.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간다?”


  방문을 열었더니 이불 속에 파묻혀있던 긴 다리가 뒤척거렸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아이같아서 킥킥 웃은 스가와라는 이불 위로 쏙 나와 있는 동그란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침이야, 일어나야지.”


  우우음. 카게야마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졸려요, 혹은 조금만 더, 뭐 그런 종류의 말인 것 같았다. 어젯밤에 뭘 했길래 아침에 이렇게 못 일어나지,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나 아침 달리기를 하고 왔을 시간인데도 오늘따라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스가와라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착하지, 토비오.”


  소곤소곤 이름을 부르며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자, 역시나 카게야마가 기겁을 하며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스, 스, 스가와라 씨?”

  “좋은 아침.”


  얼굴이 벌게진 카게야마는 자신과 달리 짓궂게 웃고 있는 스가와라를 보고 할 말을 잃은 채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엉덩이가 두드려지는 것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이름이 불리는 게 어색한 건지는 몰라도, 아침마다 유난히 일어나지 못하는 카게야마를 공략하는 스가와라만의 방법이었다. 이 필살기는 열여섯 살의 카게야마부터 열아홉 살의 카게야마까지 약 삼 년간을 지켜봐 온 결과의 산물이었다.


  “어제 밤샘 공부라도 했어? 그런 덴 취미 없잖아.”

  “…그냥 좀. 오,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알았어, 알았어.”


  항복 포즈로 두 손을 반짝 들어 보인 스가와라는 순순히 자리를 비워 주었다. 부끄러운 이유가 엉덩이 쪽인지 본명 쪽인지, 모른다고 애써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 두 쪽 다인 것을 스가와라는 알고 있었다. 방문을 닫은 스가와라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은 옛날과 비슷한데, 너는 한참 자랐구나.



  스가와라가 방을 나간 후 카게야마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방의 창문을 열었다. 괜히 부산스러운 동작으로 이불을 정돈하고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복 바지를 찾아 입었다. 잘 때 속옷만 입고 자는 카게야마는 아침에 스가와라가 엉덩이를 두드리면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비록 이불이 손과 엉덩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는 하지만 마치 제 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순식간에 부끄러워지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취직해 혼자 사는 스가와라의 집에서 얹혀살게 된 지도 벌써 삼 년이었다. 부모님이 홋카이도 꼭대기 쪽으로 전근을 가셨지만 꿈에도 그리던 카라스노 고교의 배구부 입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어릴 적부터 위아랫집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스가와라의 부모님이 제안을 해 주셨고, 스가와라 본인도 흔쾌히 이해해주었다. 카게야마는 처음 짐을 싸서 스가와라의 집에 찾아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어서 와, 카게야마.


  그렇게 말하며 웃던 스가와라의 얼굴이, 너무 빛났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보고 머리까지 슥슥 정리해 방을 나설 준비를 마친 카게야마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매콤한 냄새가 코 끝에 확 퍼졌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헷취, 재채기를 했다.


  “어, 미안. 공기가 너무 맵지?”

  “아니,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달아 자꾸 터지는 재채기를 카게야마는 자력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머리색이며 피부색이 옅은 편인 스가와라는 생김새와는 거리가 멀게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요리를 하느라 재료를 쓸 때 캡사이신의 따가움을 피할 방법은 없어서, 스가와라의 눈과 코끝도 그렁그렁 빨개져 있었다.


  아, 뽀뽀하고 싶다.


  “스가, 흐엣취, 스가와라 씨는 괜찮으신….”


  카게야마는 재채기가 고마웠다. 덕분에 몹쓸 생각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응, 나는 괜찮아. 크흥.”


  괜찮다고 하자마자 간지러워지는 코 때문에 재채기의 소리가 이상해진 스가와라는 결국 제풀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하하, 이제는 허리를 접어가며 웃는 스가와라 때문에 카게야마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퍼졌다. 스가와라 말고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미소였다.



*



  “그런데, 카게야마.”


  아침식사가 끝나고, 자진해서 설거지를 하는 카게야마의 뒤통수를 향해 스가와라가 말을 걸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연 스가와라의 말에 카게야마가 틀었던 수도꼭지를 잠갔다.


  “네?”

  “왜 지금은 코시 형이라고 안 불러?”


  예…?

  카게야마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렸을 때에는 코시 형, 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곧잘 집에 놀러가서 함께 놀기도 했던 것 같다. 십 년도 넘게 나이차이가 나는 자신과 뭘 하면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었던 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신기했다. 카게야마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무장갑을 낀 손만 내려다보고 서 있자 스가와라가 흐음, 하고 고민하는 표정을 연기했다.


  “뭐, 이제 많이 컸다고 어른 대접을 해 달라는 거라든가.”

  “…그, 그런 건 딱히…….”

  “아니면 내가 옛날처럼 좋지는 않다든가?”

  “스가와라 씨!”


  농담, 농담. 생각보다 훨씬 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려는 카게야마를 얼른 달래놓은 스가와라는 벌써 몇 년 전인지도 가물가물한 옛날의 생각을 끌어왔다. 한참은 작았던 키, 한참은 어렸던 꼬마. 과자 하나만 쥐어줘도 수줍어하며 기뻐하던, 지금은 나보다도 키가 커진 꼬마.


  “…이거, 마저 할게요.”


  생각에 빠진 스가와라가 조용해지자 카게야마는 도로 뒤로 돌아 수도꼭지를 틀었다. 솨아, 물소리가 났다. 물이 부서지는 소리와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에 기대 스가와라가 중얼거렸다.

  나한테 고백도 하러 왔었는데, 너.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설거지가 끝나고, 거치대에 그릇을 잘 정리하고,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걸쳐두는 카게야마를 스가와라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카게야마는 모든 움직임을 마치고도 잠깐 동안 스가와라를 등진 채로 서 있다가 주춤주춤 뒤로 돌아섰다. 원아 수첩을 꺼내들던 십 이년 전 그때처럼 결연한 입매를 하고 있었다.


  “스가와라 씨는…….”

  “응?”

  “왜 카게야마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저를.”


  이번엔 스가와라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분명히 이유는 있었지만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정리해 두지 못했기 때문에 스가와라는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카게야마는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스가와라를 마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만 부끄러워하면서 이럴 때는 묘하게 대담하다. 스가와라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못 하겠습니다, 저는.”


  누가 봐도 카게야마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이름으로 부르면, 진짜 가족이 된 것 같아서…….”

  “…….”

  “그건…. 싫으니까요.”


  카게야마의 아랫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제 나름대로 할 말을 다 했을 때 나오는 카게야마의 버릇이라는 것을 스가와라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에 대한 것이라면 스가와라는 어쩌면 카게야마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소년이 된 예전의 꼬마, 눈앞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품고 있는 마음조차도 알고 있었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스가와라는 솔직해지고 싶어 몸부림치는 마음 속의 자신이 조금만 진정해줬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합리화하기에 이르렀다. 서툰 마음에는 솔직하게 답해줘야 한다고, 숨기자고 생각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욕심에 이유를 달았다.


  “너도, 곧 어른이니까.”

  “…….”

  “존중해주고 싶어서. 남자 대 남자로.”


  식탁에서 일어난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마주 서니 키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서른둘의 스가와라보다 열아홉의 카게야마가 반 뼘 정도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정말, 많이도 컸네.


  “좋아해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카게야마가 말했고, 스가와라는 웃었다. 손을 들어 반 뼘 높은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십이 년이 지나서 듣는 두 번째 고백이지만.


  “대답이 늦었네. 나도 좋아해.”


  스가와라의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원아 수첩을 들고 스가와라의 집을 찾았던 어렸던 어느 날 오후의 기억이었다. 기껏해야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름을 적어오라는 의미였던 숙제가 특별해졌던 그날부터 어쩌면 어른처럼 빛났던 얼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가슴이 벅찼다. 지금은 입을 맞출 때라고 누군가가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어깨를 붙들었다. 꼬마와 어른이 동시에 소년이 된 일요일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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