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차 / 건가람 2014. 9. 22. 02:14

달성표 04. 건가람 조각 (센티넬버스 au)








가람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짜증이 난 기색이 역력한데도 억지로 입을 비죽이며 눌러 참고 있는 얼굴에 건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바락 소리를 지르느라 들썩이는 어깨가 귀여웠다. 하지만 매우 무덤덤한 얼굴로 건은 가람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내가 좀 잘난 걸 어쩌겠냐. 니가 참는 수밖에.”
“손 치워! 이 재수없는 자식, 내가 이래서 널…….”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매섭게 머리에 닿는 손을 쳐낸 후 성큼성큼 앞서 걷는 가람을 충분히 두어 걸음으로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건은 얌전히 뒤에서 따라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팔랑거리는 가람의 옆머리가 또 조금 귀여웠다.

원인은 조금 전, 센티넬-가이드 센터에서 발생했다. 원래 들르던 시간보다 늦게 센터를 찾았더니 담당 직원이 퇴근한 후였다. 가람과 건을 처음 본 여직원은 당연히 건을 센티넬 파트로 안내하려 들었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함께 서 있으면 그 중 신체 조건이 우월해 보이는 사람을 센티넬로 단정해 버리는 것이 센티넬을 동경하는 일반인의 흔한 실수 중 하나였다. 여직원이 건을 향해 센티넬 파트는 이쪽입니다, 하고 안내하자마자 가람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가지고 있는 능력 탓에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가벼운 편인 가람은 가끔 이렇게 오해를 받을 때마다 주위를 전부 날려버릴 것처럼 열을 내곤 했다.

둘이 함께 사는 집은 센터에서 멀지 않았다. 건의 집안에서 마련해 준 오피스텔은 남자 둘이 살기에 지나치게 넓은 것 같았으나, 의외로 집안일에 능숙한 가람 덕분에 제법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원래 집안일은 가이드 몫이 아니냐며 툴툴대려던 가람은 그렇다면 집값을 반씩 나눠 내자는 건의 주장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쿨한 척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람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스치는 것을 건은 우연히 발견했다. 가람에게는 비싼 집값의 절반을 부담할 경제력이 없었다. 둘은 아직 열아홉 살이었고, 가람의 가족들은 거처를 알리지 않은 채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


건의 집안은 대대로 수완 좋은 가이드를 배출해 내기로 유명했다. 센티넬의 능력이 강할수록 가이드의 수준 또한 높아야 했는데, 최연소로 SP랭크에 이름을 올린 가람의 가이드가 새파랗게 어린 건이라는 사실은 초기에 가이드 협회에서 큰 반발을 샀다. 어린 가이드가 다루지 못할 만큼의 발작이 일어나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협회의 회장직을 일임하고 있는 건의 아버지는 빗발치는 우려(의 탈을 쓴 비난)에 대해 단 한 문장으로 일갈했다.

건이는 내 아들이오.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은 벌써부터 차기 회장의 재목으로는 손색이 없다는 그 능력 때문이었다. 다섯 살 때 정식 파트너가 아닌 센티넬의 폭주를 두 번이나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팔이나 다리를 붙들었을 뿐인데 이성을 잃고 날뛰던 센티넬들은 신기하게도 금방 제정신을 되찾았다. 백씨 가문의 차남에 대한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졌고, 열여덟이 되던 해에 형식적으로 들어갔던 훈련 학교에서 가람을 만났다. 당시 능력의 특별함과 강함 덕분에 SP랭크 판정을 받은 직후였던 가람과 대면하자마자 건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싸우자.

일 년 전의 첫 대면은 그렇게 황당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건의 싸우자 타령은 훈련 학교를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졌다. 가이드 주제에 웬 대전 신청이냐며 비웃어도 계속 슬렁슬렁 따라다니며 조르는 탓에 결국 기본 격투로 몇 대 때려 주면, 제법 강한 가람의 발차기며 주먹을 맞고도 신기하게 멀쩡한 건은 만족스런 얼굴로 손도 대지 않은 채 물러나곤 했다. 그러게 이길 수도 없으면서 왜 매일 싸우자는 거냐고 가람이 되물을 때마다 건은 심드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 반찬 고기.

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가람은 늘 생각했다.
센티넬은 자신의 능력을 여러 번 쓰면 쓸수록 폭주하는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드문 확률로 능력을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반대로 침잠하는 케이스가 나타났다. 폭주 상태의 센티넬이 시한폭탄이라면 침잠 상태의 센티넬은 백사장의 모래성이나 다름없었다. 능력의 범위가 넓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무언가를 파괴하는 능력의 소유자일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도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센티넬 연구에 따르면 능력을 지나치게 방출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가둬두는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능력을 통해 소비되는 에너지가 클수록 발작에 민감한 것은 당연했다.
가람은 SP랭크 센티넬이었고, 건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직도 대낮에는 더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켜는 건을 가람이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더위보다 추위에 약한 가람에게는 환절기 오후의 에어컨이 치명적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리모컨을 빼앗아 냉방 모드를 꺼 버리고 싶었지만 더위에 미간을 찌푸린 건을 보자 그럴 수도 없었다. 센터 앞에서 들었던 말이 정답이었다. 참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저놈은 찡그린 얼굴도 잘생기고 지랄이야.

“야. 나 추우니까 금방 꺼라.”
“추워지면 니가 꺼.”

배려해줄 필요가 없는 놈이라는 사실을 가람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야, 청룡.”
“…그러니까 내가 왜 청룡이냐니까?”
“싫으면 청도마뱀 하든가.”
“이 새끼를 진짜…….”
“추우면 안 춥게 해 줄 테니까 걱정 마.”

건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시익 웃었다. 가람이 추위에 약한 것은 항상 폭주 상태보다 침잠 상태 쪽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가람의 능력은 자신에게 흘러가는 시간을 폭발력 등의 특정 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이었다. 때문에 처음 능력이 발현된 열여섯 살 이후로 가람의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자주 쓰지 않는다고는 해도 한 번 능력을 쓰면 쌓인 시간이 뭉텅이로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대가가 시간인 덕분인지 능력을 쓸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아주 강력했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일이 아닐 때 가람이 능력을 쓸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람은 열여섯의 체구 그대로였고, 또래보다 훨씬 큰 편인 건에 비하면 상당히 작았다. 그리고 건은 그 점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데 뭐가 걱정이야. 추우면 안기면 되지.”
“국자로 맞고 싶냐?”
“때리지 말고 싸우자니까.”
“미친…….”

추우면 안기면 된다니, 어디서 낯간지러운 말은 잘도 주워듣고 와가지고, 한다는 말들이 죄다 저모양이야. 가람은 속사포로 불만을 중얼중얼 뱉어내며 늦은 점심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건은 소파에 늘어진 채로 고개만 돌려 가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귀가 빨개져 있었다. 얼굴은 아마 눈동자 색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제 몸집이 작았던 시절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건에게, 꼬물꼬물 움직이는 가람의 손과 어깨와 입술은 신기했다. 훌쩍 몸을 일으킨 건은 부엌으로 걸어가 당근을 써는 가람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너 이, 뭐하는 거야 갑자기?”
“내가 뭐.”
“나 칼 들고 있거든? 당근처럼 썰리기 전에 떨어지지?”
“어차피 나 안 다치잖아.”
“…….”
“니 덕분에.”

칼질을 하던 가람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대신 오른발로 건의 흰 발등을 콱 밟아주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멍이 들 정도의 기운이었다. 아. 성의 없는 비명으로 예의상 고통을 표시해 준 건은 밟힌 발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가람의 귓등이며 목덜미에 점점이 입을 맞췄다. 그만 좀 하라고! 아예 칼질을 멈춘 가람은 그래도 건의 품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아도 건과 가람은 세 달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일단은 연인 사이였다.


*


싸우자.
너 죽어도 난 모른다.

가람이 건의 싸움 걸기에 응해준 것은 첫 만남 이후로 몇 달이나 지나서였다. 센티넬끼리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가람은 당연히 능력이 아닌 몸싸움으로 건에게 달려들었다. 건은 당연히 몸에 전달될 충격을 대비해 질끈 눈을 감았다. 퍽, 가람의 주먹이 건의 상체를 거세게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가람의 주위에서 순간 화악, 바람이 불었다. 능력을 썼다는 뜻이었다.

시간을 대가로 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 가람은 자유자재로 그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건물 하나쯤을 날리는 일도 가능했고, 손가락이 두 동강 난 사람을 낫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일종의 보호막을 둘러주는 것 또한 훈련을 받으면 가능했다. 가람은 그 사실을 직접 체감해서 알고 있었고, 건은 그 사실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가람과 눈이 마주쳤다.
벌게진 얼굴로 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그날부터였다. 건은 가람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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