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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 (결혼했던) 키세에게 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키세는 습관처럼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려 덮개를 오른손 엄지로 밀어 열었다. 삐리릭,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현관 안쪽에서 우당탕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키세는 그제야 제 캐리어 안에 인형놀이 세트가 들어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약 한 달 만의 재회였다. 스스로 문을 여는 대신 키세는 급하게 마중을 나오는 작은 발소리에 보답하듯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잔뜩 신이 난 목소리가 그렇게 물었다. 키세가 올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평소에 배운 대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군지 물을 줄도 알고 기특하네, 그렇게 생각한 키세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공주님 보러 누가 왔게요?”
찰카닥, 도어락의 잠금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아빠! 유카 왔어요! 아빠도 왔어요!”
팔을 한껏 뻗어 키세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롱대롱 매달린 유카는 못 본 새 또 성큼 자란 것 같았다. 번쩍 안아 올려 말랑한 뺨에 입을 맞추자 유카가 까르르 웃었다. 아이 특유의 분내가 났다. 키세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잉, 아빠 강아지예요? 아이의 뺨에 코끝을 묻고 숨을 쉬고 있으려니 유카가 작은 손으로 키세의 머리를 밀어냈다. 푸하하, 알았어요. 키세는 얼굴을 떼고 유카에게 웃어주었다.
“고모는?”
“할아버지 집에 갔어요. 쪼금 전에 갔어요.”
“응. 밥은 먹었어요, 우리 공주님?”
“돈카츠 먹었어요! 고모가 이렇게 짤라서 줬어요.”
이렇게, 라며 유카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가위질하는 시늉을 했다. 우와, 그랬어? 꼭꼭 씹어서 배부르게 먹었죠? 가벼운 반존대를 쓰는 키세에게 배운 것인지, 유카는 아이답지 않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오늘도 다를 것은 없어서, 반듯한 존댓말로 키세의 되물음에 대답하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세 료타의 하나뿐인 딸 키세 유카는 올해 다섯 살이었다. 길게 잡힌 촬영 때문에 둘째 누나에게 유카를 맡기고 해외에 다녀온 키세는 촬영기간 내내 하루에 한 번씩, 파리의 아침이자 도쿄의 저녁 시간에 누나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빼먹은 것은 딱 하루뿐이었다. 원래 2주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끝날 무렵 2주가 더 늘어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온 키세에게, 키세의 누나는 유카가 어른스럽게도 한 번을 칭얼대지 않는다며 신기하다고 했다. 그것도 다 유전이라며 뻔뻔하게 농담을 던지는 키세에게 누나는 부모님과 반나절만 떨어져 있어도 징징 울던 누구누구랑은 아주 다르다며 장난 섞인 핀잔을 주었다. 유카는 갓난아이일 때부터 유독 잘 웃고 순해서 그 누구도 애먹인 적 없는 착한 아이였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모델 활동, 고등학교 때는 화려한 농구선수, 지금은 입지 확고한 모델 겸 탤런트. 스물이 되자마자 남들보다 이른 결혼, 딸 하나를 낳고 세상을 뜬 아내, 어미의 부재를 알기라도 하듯 순하디순한 아이. 아내 없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젊고 잘생긴 스물여섯 살 남자. 대외적으로 알려진 키세는 잘 짜인 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그리고 정말 잘 짜인 드라마에는 항상 놀랄만한 지점이 있었다.
키세는 아이를 한 팔로 안은 채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와 있는 메일을 확인했다.
[ 잘 도착했습니다. ]
그였다.
옛날도 지금도, 아이처럼 분내가 나던.
키세는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적셨다.
*
한겨울,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의 파리는 추웠다. 키세는 코 밑까지 칭칭 두른 목도리 안으로 고개를 더 집어넣으려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사흘 후면 모든 로케이션 일정이 종료였고, 귀국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돌아가기 전에 에펠탑이라도 제대로 보러 나가자는 로맨틱한 제안에 스태프들이 전부 고개를 저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1월의 칼바람 앞에 파리의 낭만 같은 것은 없었다. 황금색 조명을 달고 빛나는 철제 탑을 올려다보며 키세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한 번 훌쩍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에.
입장료를 내고 탑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고 들은 것 같았지만 지금 날씨에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정말 코가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차라리 더운 게 낫지 추운 건 딱 질색인, 뜨거운 일본 남자 키세 료타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세계적인 관광 명소답게 이 날씨와 시간에도 인파는 제법 북적거렸다. 길거리 여기저기에 군것질거리를 파는 노점이 서 있었지만 키세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숙소를 향해 걷고 있었다. 촬영 중에 쓸모없는 식사는 절대 금물이었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 하나도 배고프지 않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목도리 속으로 고개를 푹 파묻었다. 한껏 내려간 시야에는 발끝만 보였다.
배 안 고파.
하나도 안 심심해.
안 쓸쓸해.
…진짜.
하지만 혼자였다. 물론 숙소에 돌아가면 스태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과 누나가, 그리고 딸이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키세는 스스로 혼자였다. 싱그럽게 웃는 얼굴, 가끔 핀잔을 듣지만 기본적으로는 서글서글한 성격, 늘 주위에 팬과 동료 연예인들이 몰려드는 인기인.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지만 사실 키세의 본성은 인파 속에서 홀로 목도리에 얼굴을 숨긴 이방인 같았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옛날부터 알아 온 동창 몇 명, 누나들, 부모님. 심지어 그 동창 몇 명은 친구라고 하자니 조금 살벌하고 동료라고 하자니 조금 특별한, 농구를 하다 만난 몇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눈치가 없는 바보 몇 명은 제외해야 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몰라. 바보, 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얼굴 몇 개 때문에 그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큭 웃으려던 키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이윽고 어떤 한 명을 떠올리고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엇.”
거의 땅바닥을 탐색하는 것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걷다가 결국 누군가와 부딪친 키세는 눈부터 질끈 감았다. 서양에 와서도 신장으로는 지지 않는 키세보다 어깨가 한참 낮았다. 동양인인가? 그럼 프랑스어로 인사 안 해도 되겠지? 짧은 시간에 그렇게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 조금 안심한 키세는 미안한 웃음을 얼굴에 걸고 고개를 들었다.
떠올린 사람을 눈앞에 구현해 내는 재주가 내게 있었던가.
“…설마 키세 군?”
원체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놀란 표정은 그 중에서도 더더욱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귀신을 본 것처럼 키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몇 년, 중학교 삼 학년 때 말없이 사라지고, 그리고 이런 타지에서, 내가 지금 몇 살…….
키세는 햇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입 밖으로 눈앞에 선 옛 동료의 이름, 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정다운 호칭을 읊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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